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악의 문제4
    카테고리 없음 2021. 3. 10. 20:24

    이레니우스의 관점에서 고통은 선을 창출하기 위한 수단이다. 인간의 고통은 인격적 완성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이레니우스의 관점에서 인간의 인격적 완성은 성인과 같이 고귀한 인격을 지닌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종말에 이르러서 인간이 구원받을 때 그 순간의 인격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종말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모든 고통은 사실상 선을 창출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비록 더 나은 상태를 창출하기도 하지만 궁극적 의미에서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 전까지는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과 경험한 고통은 목적을 이루지 못한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믿고 신뢰한다면 고통이 지향하는 지점은 존재한다. 

    힉은 목적 없는 고통, 목적 없는 악은 존재한다고 하는 듯하다. 목적 없는 악이 존재한다고 전제해버리면 악을 정당화 하려는 신정론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이레니우스는 모든 악이 인간의 인격적 완전성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은 선의 결핍이라 설명하면서, 미학적 관점으로 악을 설명한다. 목적 없는 고통 즉 목적 없는 악을 전제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 이레니우스적 신정론들은 모두 그 앞에 무너져내릴 것 같다. 목적 없는 악이 존재한다는 전제는 이레니우스적 신정론과는 완전히 대치된다. 이레니우스적 신정론에서는 모든 악은 선, 즉 인간의 인격적 완전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다.즉 이레니우스적 신정론에서는 모든 악은 목적이 있는 것이고, 따라서 목적 없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즉 목적 없는 악, 고통을 부정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신정론에서는 목적 없는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까 나름 생각해보았다. 목적 없는 고통도 미학적 관점에서 설명 가능할 것 같다. 목적 없는 고통은 최악의 고통이자 최고의 악이다. 그렇다면 미학적 관점에서, 최악의 고통, 최고의 악이 존재함으로서 그에 상응하는 최고의 쾌락(?) 최고의 선이 존재할 것이다. 즉 목적 없는 고통, 악은 최고의 선이 최고의 선이 되게 하는 것이다.여기서 최고의 선은 추측컨대 하나님의 사랑일 것 같다. 

    하지만 어떠한 설명이든 간에 목적 없는 고통은 우리 인간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절망을 가져온다. 목적 없는 고통이 있다면, -나는 명백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너무나도 불공평하게 창조된 것이다. 죄 없는 고통, 목적 없는 고통은 세상을 너무나 불공평하게 만든다. 즉 부정의하게 만든다. 죄가 없음에도 고통 받는 것을 신은 어떻게 설명할지 너무나도 궁금하다. 인간에게 있는 '합리성'은 완전하지 못하다. 인간은 합리성에 반하는 행위를 많이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기독교의 신은 지극히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의 모든 행위에는 목적이 있어야하고, 모든 행위는 선해야하고, 옳아야 한다. 그런데 목적 없는 고통은 신의 특성에 반하는 것이다. 그런데 목적 없는 고통은 존재한다. 세상이 합리적이려면, 모든 인간은 노력한 만큼, 노력에 따라 결실을 얻고, 나태한 만큼 실패를 맛 봐야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절대 그렇지 않다. 신이 있다면, 신이 창조한 세상은 너무나 불합리적이고, 부정의하고, 불공평하다.

    예를 더 들어보자면, 낙태로 인해 태어나기도 전에 죽는 아이는 어떠한가? 큰 장애를 갖고 태어나는 아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러한 것도 목적 없는 고통에 포함되는 것들이다. 이러한 목적 없는 고통, 즉 악을 설명한다면서, '악은 선을 위한 수단이다.'라든지 '악은 미학적 관점에서 존재한다.'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선을 목적으로 이러한 악이 존재한다는 것이 합리적인가? 위와 같은 악은 어떠한 선의 목적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악이다.고통의 당사자의 얼굴에 대고 위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신정론의 입장을 갖고 악의 문제를 정당화 하려는 사람들은 추상적인 악, 뭉뚱그려진 악에 대해서 정당화 할 것이 아니라,(이때까지 공부해왔듯이)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악에 대해서 눈 가리고 아웅 해서는 안 된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